안녕하세요. 방디입니다.
이전 글에서 안내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John Updike의 A&P 한글번역을 소개하겠습니다.
3~4년 전 제가 직접 번역한 글이며, 다른 곳에서 활용하고 싶으시거나 오역이 있는 경우에는 댓글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i, this is BangD.
In this article, I present you the Korean-translated version of A&P, a short story written by John Updike.
I translated the story myself, and if you find any issue related to copyright or mistranslation, please let me know through comments.
Thank you.
※ 원문 보러 바로가기 (Link for the original text) bangd-news.tistory.com/23
[방디] 존 업다이크 - A&P (원문) / John Updike - A&P (Original Text)
안녕하세요. 방디입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영미문학으로 John Updike의 단편 [A&P]를 소개하려 합니다. 이전에 다룬 [Hills Like White Elephants]와 마찬가지로 이 글 역시 학부 수업에서 들었던 단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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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P
존 업다이크, 1961
막 들어오는 여자아이 세 명을 보니 걸친 것이라곤 수영복뿐이었다. 나는 세 번째 계산대에서 문을 등지고 서있었기에, 이 아이들은 빵 판매대 근처에 오고 나서야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처음 내 눈을 사로잡은 아이는 격자무늬의 녹색 투피스를 입은 아이였다. 땅딸막한 몸은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고, 다리 위쪽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는 엉덩이가 탐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 밑을 따라 가보니 태양이 미처 손을 대지 못한 듯이 새하얀 피부가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하이호 크래커를 손에 들고선 계산을 했는지 안했는지 고민 중이었다. 과자를 한 번 더 계산하자, 앞에 있던 손님이 나에게 지옥을 보여준다. 이 손님으로 말하자면 눈썹은 없고 양 볼에 연지를 바르고 다니는 50대 정도 부인으로, 항상 마녀처럼 계산대를 감시하곤 한다. 오늘은 나를 가만두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하다. 40년 동안 계산대를 보면서 실수하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는 듯 말이다.
겨우 진정시키고 가방에 물건을 담아 주자 부인은 코웃음을 슥 날리며 지나갔다. 아마 중세 마녀사냥이 있던 시대였다면 살렘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리라. 부인을 보내고 나서 보니 세 여자아이는 쇼핑 카트도 없이 빵 판매대를 구경하고선 계산대와 쓰레기통 사이 복도를 따라 내가 있던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이제 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다. 투피스를 입은 땅딸보 아이를 다시 보니, 옷 색깔이 밝은 녹색에 가슴 솔기 줄이 아직 닳지 않았고, 배 부분도 타지 않고 아직 하얀 것을 보니 수영복을 새로 산 것 같았다. 얼굴을 보니 토실토실한 열매처럼 생겼고, 입술은 코 밑으로 뭉쳐 있었다. 그 옆에는 키 큰 아이가 있었는데, 검은 머리가 아직 곱슬기가 제대로 먹지 않은 듯 했다. 눈 아래쪽으로는 햇볕에 태운 흔적이 있었고, 턱은 꽤 길었다. 이런 아이들은 보통 “매력적”이라거나 “멋지다”라는 말을 듣곤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예쁘지 않다는 것을 다들 알기에 서로 잘 어울려 다닌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아이는 키가 그리 크진 않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여왕이었다. 다른 두 친구들이 이곳저곳 돌아보며 구경할 때 이 아이는 이끄는 역할을 맡은 듯 했다. 이 아이는 구경하지 않고 앞만 본 채 오페라 가수나 가질 법한 희고 긴 다리로 천천히 걷기만 했다. 걷는 모습을 보니, 맨발로는 처음 걸어보는 것처럼 발뒤꿈치에 힘을 주며 다니고 있었다. 발뒤꿈치를 내려놓고 무게를 슬며시 발가락까지 옮기는, 마치 한발 한발 바닥을 살펴보는 것처럼 조금은 과장되게 걷고 있었다. 여자아이들 마음속을 읽기란 쉽지는 않지만 (이 아이들에게 있는 것이 정말 마음일까 아니면 유리병 안에 든 벌처럼 항상 윙윙대는 것일까?) 이 아이가 다른 둘을 데리고 매장에 들어왔다는 것쯤은 알아차리리라. 이제 보니 이 아이는 가르치기라도 하듯이 몸을 딱 세우고는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아이는 물방울무늬가 달린 칙칙한 분홍색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 베이지색일지도 모르겠다.) 그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끈이 내려가 있다는 점이었다. 끈은 어깨에서 내려와 팔 위쪽에 후줄근 걸려있었다. 그래서인지 수영복은 아이의 몸에서 살짝 흘러내려와 있었고, 허리 위쪽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밝게 빛나는 몸뿐이었다. 수영복이 흘러내리지만 않았어도, 아마 아이의 두 어깨가 세상에서 가장 하얗게 보였으리라. 끈이 내려가 있는 모습을 보니 내려가 있는 수영복과 아이의 얼굴 사이에는 아무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움푹 파인 금속판이 빛을 반사시키는 듯한 그 어깨뼈 밑으로 맨살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 마디로, 단순히 예쁘다 말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웠다.
머리카락은 마치 햇빛과 소금물이 바래놓은 듯 갈색을 띄었고, 쪽머리는 거의 풀어졌지만 얼굴은 단정해 보였다. 수영복 끈을 헤친 채로 A&P 매장에 발을 들이는 아이에게 딱 맞는 얼굴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는 고개를 너무 바짝 들었는지, 하얀 어깨를 타고 올라오던 아이의 목이 뻣뻣해 보였지만, 나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목이 길어보일수록 더욱 내 눈에 잘 들어왔으니까.
아마 내가, 그리고 내 뒤 두 번째 계산대에 있던 스토케시가 훔쳐보고 있는 것을 이 아이도 곁눈질로나마 눈치 챘겠지만, 전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여왕답게 말이다. 아이는 진열대 사이사이로 시선을 옮기다가 순간 멈추더니, 천천히 돌아서는 바람에 날 놀라게 했다. 그러더니 다행히 반대쪽에 있던 다른 두 아이를 불러서는 세 아이 모두 복도를 따라 애완동물 사료, 아침식사용 시리얼, 마카로니, 쌀, 건포도, 조미료, 데일리스프레드 버터, 스파게티, 청량음료, 과자 진열대를 지나갔다. 내가 있던 세 번째 계산대에서는 이 복도에서부터 정육 매장까지 볼 수 있어서 아이들이 가던 모습을 다 지켜보았다. 몸을 잘 태웠던 뚱뚱보 친구는 과자 진열대에서 잠시 머물렀지만, 이내 생각이 바뀐 듯 과자봉지를 다시 내려놓았다. 양들이 쇼핑 카트를 끌며 복도를 따라 가는 모습도 꽤 우스웠다. 우리가 표지판을 달아놓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 여자아이들은 다른 손님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데, 여왕의 새하얀 어깨가 눈에 들어오자 손님들은 얼굴을 실룩대거나 몸을 들썩이고 딸꾹질까지 하다가도 어느 샌가 다시 각자 장바구니만 챙기며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아마 A&P 매장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도 사람들은 대부분 장 볼 목록에서 오트밀을 지우며 이렇게 중얼대기만 할 것이다. “세 번째 살 게 있었는데, ㅏ로 시작하는 거였나... 아스파라거스? 아닌데... 아, 사과 소스다!” 이 말이 아니라고 해도 분명 무언가 중얼대리라. 하지만 분명 사람들은 반응하고 있었다. 머리핀을 꽂은 가정주부들도 방금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카트를 밀고 지나가다가도 다시 뒤돌아보곤 했다.
알다시피 해변에서야 태양이 하도 강해서 서로 쳐다볼 일이 별로 없겠지만, A&P에서는 사방에 물품뿐이고 형광등도 있어서, 엷은 녹색 격자무늬 고무바닥을 맨발로 걸어 다니는 모습은 해변에서 수영복을 입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옆에서 스토케시가 중얼댔다. “아빠, 나 쓰러지겠어요.”
“이런, 이런. 날 잘 잡고 있어.” 스토케시는 결혼해서 아이를 둘 두었고, 양육을 조금 버거워 하기는 하지만, 뭐, 굳이 나와 다른 점을 찾자면 딱 그뿐이었다. 스토케시는 22살이고, 나는 올 4월에 19살이 된다.
“지나갔어?” 책임질 식구가 있는 이 유부남이 다시 목소리를 냈다.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스토케시는 한 1990년쯤에는 자기가 매장 관리자가 되어서, 이름은 뭐래나, 위대한 알렉산드로브와 페트루스키 차 회사로 한다나.
스토케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리라. 근처 해변에는 여름마다 관광객이 몰려들고, 우리 마을은 거기서 8km 정도밖에 안 떨어져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매장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어서 여자들도 차에서 내려 거리로 나올 때면 셔츠 같은 것이라도 걸치고 나오기 마련이다. 물론 대부분이 애 여섯 명 정도 딸린 아주머니들이고, 정맥류로 다리가 좀 부풀어도 신경 쓰지 않는 부류이다. 말했듯이, 우리 매장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어서 정문에 서 있으면 은행 두 개와 조합 교회 하나, 그리고 신문 가게 하나와 부동산 세 개가 보인다. 하수구도 터져서 중앙 도로에서는 노동자 27명이 땅을 파헤치고 있다. 그러니까 이곳은 케이프처럼 바다 근처가 아니라 단지 보스턴 북부일 뿐이다. 사람들이 한 20년 동안 바다 근처에도 가지 못 한, 그런 곳이라는 말이다.
여자아이들은 정육점 계산대에 가서는 맥마흔 씨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있었다. 맥마흔 씨가 어딘가를 가리키자 아이들도 가리키며 확인했고, 곧 다이어트 딜라이트표 복숭아가 잔뜩 쌓여 있는 산 너머로 사라졌다.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늙다리 맥마흔 씨가 자기 입을 두드리면서 아이들을 치수 재듯이 바라보는 모습뿐이었다. 불쌍한 애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이제 이야기는 슬프게 흘러간다. 우리 가족들은 슬프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또 그렇게 슬픈 것 같지는 않다. 목요일 오후라 그런지 매장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우리는 그냥 계산대에 기대서서 여자아이들이 언제쯤 다시 나타날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핀볼 기계처럼, 매장 어느 구석에서 아이들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아이들은 먼 복도에서 모습을 보였다. 그 복도에는 백열전구도 있고, 캐리비언 식스나 토니 마틴의 레코드판도 할인 중이었다. 물론 노래를 왜 부르는지 의문인 애들 것도 있었지만. 그 외에도 종이상자에 포장된 사탕이나 꼬마 애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떨어질 것 같은 셀로판 플라스틱 장난감도 있었다. 우리 여왕은 여전히 무리를 이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손에 조그마한 회색 병을 하나 들고 왔다. 세 번째부터 일곱 번째 계산대는 싹 비어있어서 여왕은 스토케시랑 나 둘 중에 고민하는 듯 했다. 때마침, 평소에도 운이 좋던 스토케시는 회색 헐렁 바지를 입은 중년층들이 와서 큼지막한 파인애플 주스캔 네 개 계산을 맡았다. (종종 이 빈둥이들이 왜 파인애플 주스에 이렇게 집착하는지 스스로 묻곤 한다.) 결국 아이들은 내 계산대로 왔다. 여왕은 병을 내려놓았고, 나는 그 차가운 병을 집어들었다. 600원짜리 ’산패유에 담근 킹피시 팬시 청어 과자‘였다. 여왕의 손을 보니 이제 반지나 팔찌 하나 없이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깨끗하게 비어있었고, 도대체 돈은 어디서 나올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여왕은 여전히 새침한 얼굴을 보이면서 분홍색 상의 빈 공간에서 구겨진 지폐를 하나 꺼냈다. 손 안에 있던 병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진짜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모두로부터 운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렝겔 씨가 주차장에서 양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 기사랑 실랑이를 하고 있었는데, 평소에 일을 하는 관리자 방으로 급히 들어가려다가 여자아이들을 딱 본 것이다. 렝겔 씨는 꽤 따분한 사람으로, 일요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뭐 하나 놓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렝겔 씨가 가까이 와서는 한마디 했다. “얘들아, 여긴 해변이 아니다.”
여왕은 볼을 살짝 붉혔던 것 같다. 내가 맨 처음에 봤던 선탠 자국일수도 있지만, 지금은 꽤 가까이서 봤으니까. “저희 엄마가 청어 과자 한 병 가서 사오라 하셨어요.” 여왕의 목소리를 들으니 좀 놀랐는데, 처음 본 사람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생기 없이 주눅 들어 있으면서도 뭔가 고급스러웠다. 특히 “과자”나 “가서” 부분에서 탁 꺾이는 점이 그랬다. 순간 나는 그 목소리를 통해 여왕이 지내는 거실을 상상했다. 여왕의 아버지와 다른 아저씨 한 명이 아이스크림 코트와 나비넥타이를 하고선 서 있고, 여자들은 샌들을 신고선 이쑤시개로 청어 과자를 집어 큰 유리그릇에 올려놓고 있다. 그러고선 다 같이 민트향 잔가지와 올리브를 넣은 음료를 든다. 우리 부모님에게 누가 찾아온다면 아마 레몬에이드 정도 마시지 않을까. 정말 중요한 날은 되어야 “사람들은 매번 그럴 거야”라는 만화가 그려진 큰 잔에다가 쉴리츠 맥주 정도 마실 것이다.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여긴 해변이 아니라니까.” 렝겔 씨가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 갑자기 우습게 다가왔다.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아마 그 동안 A&P 매장은 커다란 모래사막이고, 자신이 구조대원 대장쯤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놓치는 것이 없다고 말한 걸 보여주듯 렝겔 씨는 내가 웃는 걸 보곤 기분이 언짢아 보였지만, 계속 여자애들에게 집중하며 일요학교 교사의 눈초리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붉은 볼은 더 이상 선탠 자국으로 보이지 않았고, 뒷모습이 더 나았던 뚱뚱보 격자무늬 친구도 화가 나 잔뜩 부풀어 올랐다. “쇼핑하러 돌아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이거 하나 사러 온 거예요.”
“그래도 똑같잖아.” 렝겔 씨의 눈을 보자 여왕이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는 것을 방금 안 것 같았다. “여기 들어올 때는 옷을 제대로 입고 와야지.”
“제대로 입었는데요.” 여왕이 아랫입술을 내밀며 훅 들어온다. 자기가 어느 장소에 있는지를 기억한 것이다. A&P 같은 매장에서 손님이라면 대부분 평범한 옷차림일 테니 말이다. 팬시 청어 과자가 여왕의 푸른 눈동자 안에서 빛났다.
“얘들아, 말다툼을 하자는 게 아니야. 다음에 올 때는 어깨는 가리고 오렴. 그게 우리 방침이란다.” 렝겔 씨가 등을 돌린다. 그건 당신이 원하는 방침이지. 방침은 사장님들이 정하는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방침이니 하는 건 청소년 비행 같은 일이지.
이 사단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손님들은 계속 카트를 끌며 나타났지만, 양들이 다 그렇듯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서 죄다 스토케시한테만 몰려갔다. 스토케시를 보니 복숭아 깎듯이 종이가방을 소중하게 털어 열면서 손님들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도 다들 기분이 언짢다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렝겔 씨가 말이다. 렝겔 씨는 내게 물었다. “새미, 얘네들 거 계산했니?”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던 것은 이 대답이 아니었다. 계산이야 버튼 몇 개 누르는 거니까 어려울 것이 없다. 4, 9, 드르륵, 탁. 생각보다 복잡하긴 하지만 여러 번 하다 보면 노래처럼 들리기도 한다. “안녕 (삑), 너도 (띵) 행복하구나 (덜컥)!“ 덜컥 소리가 나면 돈 통이 열린다. 지폐를 꺼내 편다. 다들 상상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개 사이에서 나온 지폐처럼 조심스레 폈다. 그리고는 50센트 1페니를 여왕의 좁은 분홍색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청어 과자는 종이 봉지에 넣어 입구를 비틀어 닫고 여왕에게 준다. 계산하는 줄곧, 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중얼대던 손님들과 함께 여자아이들도 허둥지둥 매장을 나가려 하였고, 순간 나는 아이들이 멀어지기 전에 ”저 그만둘게요.“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이 돌아보기를 바랐다. 이야말로 예상치 못한 영웅의 등장 아닌가. 하지만 아이들은 자동문을 향해 계속 걸어가기만 했다. 문이 삭 열렸고 아이들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로 스쳐지나갔다. 여왕과 격자무늬아이, 그리고 훤칠한 멍청이(그렇게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셋이 사라지자 자리에는 나와 눈살을 찌푸린 렝겔 씨만이 남았다.
”방금 뭐라 했지, 새미?“
”그만 둔다고 했어요.“
”그런 거 같구나.“
”애들 창피 줄 필요는 없었잖아요.“
”걔네가 우릴 창피하게 한 거지.“
순간 나도 모르게 ”헛소리하네.“라고 할 뻔했다. 우리 할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로, 내가 썼으면 할머니는 좀 좋아하셨으려나.
”너가 지금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인 거 같은데.“
”아저씨는 모르겠죠. 근데 전 알아요.“ 나는 앞치마 매듭을 풀어버리고 어깨에서부터 끈을 내렸다. 내 계산대로 오던 손님 둘이서 서로 부딪혔고, 그 모습은 마치 돼지가 낙하산을 타서 무서워하는 꼴이었다.
렝겔 씨는 푹 한숨을 쉬더니 그 나이 든 잿빛 얼굴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렝겔 씨는 우리 부모님과 오랜 세월 친구였다. ”새미야, 어머니 아버지께 이러고 싶지 않잖니.“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일단 칼을 뽑아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되지 않겠는가. 나는 주머니에 ”새미“라는 이름이 붉게 박혀 있던 내 앞치마를 고이 접어서 계산대에 올려놓고 나비넥타이도 그 위에 두었다. 혹시 궁금할까봐 말하는데, 나비넥타이는 회사 용품이다. ”앞으로 계속 후회하게 될 거다, 새미.“ 이 말도 사실이겠지만, 렝겔 씨가 그 아름다운 아이를 창피하게 만든 것을 생각하니 속이 다시 부글부글 끓는다. 홧김에 ’옆 계산대를 이용하세요” 팻말을 탁 내려놓자 기계가 덜컥 소리를 내며 돈 통이 열렸다. 이때가 여름이어서 다행인 점이라면, 코트나 덧신 챙길 필요 없이 바로 나갈 수 있다는 점? 그저 전날 어머니가 다려 주신 흰 셔츠를 입은 채로 자동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바깥에서는 햇빛이 아스팔트 위로 내리쬐고 있다.
여자아이들을 찾아보았지만, 당연히 이미 가고 없었다. 젊은 엄마들 몇 명만 연청색 차 옆에 서서 사탕을 안 가져왔다고 아이들과 소리 지르고 있었다. 도로에 놓인 물이끼와 알루미늄 정원 가구 위로 커다란 창문을 쳐다보니 렝겔 씨가 내 계산대에 서서 양들을 보내고 있었다. 얼굴은 짙은 잿빛이었고 등은 누가 보면 철심 박은 줄 알 정도로 뻣뻣했다. 이를 보니 앞으로 세상이 나에게 얼마나 힘들게 다가올지 가슴 속으로 걱정되기 시작했다.